『제독행공 및 기의 현상들1』/8. 영통개안

영통개안

청아당 2019. 7. 16. 08:57

영통개안



<그림> 영통개안(깨달음의 관문 ; 천지가 개벽하는 모습)

 

 

등줄기로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대주천을 경험하고 나면 심안(心眼)을 통해 영통개안이 이루어진다. 천지가 개벽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우주의 태양이 상단전에 위치한 심안을 통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영통개안(靈通開眼)이다. 주변은 정적으로 감싸이고 오로지 내부의 강력한 우주적인 탄생만이 새로운 모습으로 심안에 가득하게 차오른다. 어찌 보면 우주 창조의 원동력인 태양의 탄생과 비슷한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몸 안에 이렇게 강력하고도 끝없는 우주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영통개안(靈通開眼)이란 깨달음의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이다. 이제 막 지구의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주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우주에 들어서면 갈 길이 멀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별들을 통과하여 처음과 끝을 경계 없이 드나드는 경지에 이르러야한다. 그의 세계는 빛으로 무르녹아 있고 빛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여 온갖 형상의 변화를 체험하는 지고(至高)의 경지이다.

 

솔직히 빛의 안쪽에 들어서면 경계는 찾을 수 없다. 그 내부에는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고요만이 광휘처럼 찬란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또한 우주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빛으로 무르녹아 있는 상태이다. 드나듦의 경지를 뛰어넘은 경지도 바로 이러한 세계에서 더 나아갈 데도 들어갈 데도 없는데서 기인한다. 한마디로 말로서는 그 형상을 잡아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 마치 잡으면 사라지는 이슬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 존재를 남에게 보여주려는 순간 이미 그 형상은 사라지고 난 뒤라 허망함만을 안겨주게 되는 꼴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보여주려는 순간 이미 형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손으로 만질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직접 느껴야만 한다. 깨달음은 그야말로 체험학습의 결정체이다. 체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도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언제든지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 하지만 반드시 수고를 요구하는 대가성 조건을 까다롭게 내걸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다.

 

깨달음은 안팎으로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깨달음의 구조는 마치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구조와 비슷하다. 사상의 지평면을 통과하여 화이트홀로 연결되는 점은 깨달음의 구조와 유사하다할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성간의 의미를 지닌 인터스텔라(interstellar)와 같은 구조로 연결되어지기도 한다. 이는 태양계 우주 공간행성간 공간을 뜻하는 인터스텔라 스페이스(interstellar space)로 확대되어지기도 한다.

 

단순히 생명에너지의 모임만으로는 이러한 혜택을 입기가 어렵다. 보다 체계적이면서도 원리에 충실한 인체전자석의 집적능력으로 인해 생명에너지를 우주의 태양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별도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없이 되돌아오는 연습(숙련된 고도의 기술)을 통해 생명에너지를 단()의 형태로 만들어 보통의 상태에서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수고가 필요하다. 생명에너지가 영적으로 승화되어야 우주와 연결된 영적인 존재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교류는 보다 큰 만남을 주선하고 보이지 않는 관계를 끈끈하게 맺으려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명할 때 우주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영통개안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신비적인 영적 능력들이 존재한다. 단전호흡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영적인 능력과 연계기능을 강화시켜 초월적 신비현상을 경험해보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순수한 생명에너지를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단전호흡을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생명에너지가 영적으로 승화되어야만 우리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호흡량만 늘어나고 생명에너지의 영적인 승화과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무언가 획기적인 접근과 체계적인 원리를 터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할 수 있다. 어찌 보면 깨달음의 세계는 두 번째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을 중요시하듯이 두 번째에서는 큰 감동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이러한 신선함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순결을 가장 신성하게 떠받드는 것도 다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영통개안은 한번으로 족하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의 집을 드나들 듯이 문만 열고 출입을 하면 된다.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