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관법(內觀法) - 내적치유와 우아일체 과정이다
지식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사람들이 ‘안다’라는 개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머릿속의 지식(인간적인)으로 아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관계(우주적인)를 통하여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둘의 관계 속에는 겉과 속이라는 대립관계가 내포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이 정보를 통해 입력된 내용이라면, 관계는 경험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내적 자아와 함께 감응하는 보다 고도화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식은 교만을 포함하면서 인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면, 관계는 겸손이라는 낮은 자세로 임하면서 하늘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깨어있는 내적 삶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물론 지식은 인간생활에서 꼭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지만, 내적 자아로 진입할수록 보다 더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특이한 경험이기도 하다.
지식도 필요하지만 지식을 통해 지식을 내던질 수 있는 내관법은 보다 고도화된 내적 자아로 진입하여 강한 손(보이지 않는 손)과 우아일체를 맛보는 특이한 상황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믿음은 선물이다’고 말하고 있는 어떤 신앙인의 고백처럼 믿음 속에는 위대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거나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믿음이 주는 선물의 힘이자 우주본연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믿은 만큼 그에 상응한 보답이 주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인 것처럼 믿음을 단순히 종교적인 꽃으로만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의념의 또 다른 모습으로 대입시켜보면, 의념의 힘은 참으로 무섭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교만하게 태어났다’고 한다.
교만은 누를수록 튕겨나가는 힘이 있다. 교만을 누르기위해서는 겸손이라는 그물을 던지지 않으면 교만은 수그러들지가 않는다.
수없이 겸손이라는 그물을 던지지만, 교만은 겸손이라는 그물을 뚫고 빠져나가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렇지만 교만은 인내심이 부족하여 수시로 탈출을 시도하지만, 겸손은 인내심이 강해 수없이 도전하며 문제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진정시켜나가기도 한다.
만약에 겸손이라는 안전장치가 없었더라면, 교만은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지축을 흔들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교만 옆에는 겸손이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 제동장치를 걸 수 있다는 것이 천행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진정한 변화의 힘은 나와 우주가 하나 되는 일이다.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여 가든지간에 꼭 필요한 것은 우아일체로 가는 길목에서 내적치유가 이루어지는가이다.
내관법은 인간 안에 굳어진 습관이나 관습을 깨뜨려가며, 내적치유와 함께 우아일체로 가는 길을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과 왜곡된 가치관 등을 내려놓으며 마음을 개방한 후 보이지 않는 손(강한 손)에 이끌려 불평등한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삶이야말로 내관법의 핵심 내용인 것처럼 ‘매우 분명하고 단순하게 인간의 깊은 부분에 숨겨진 고통의 씨앗들을 찾아내어 치유’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벽돌 속에 단단하게 갇혀 있는 또 다른 자아를 깨우기 위해서는 지식만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다. 우주에너지와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미쳐야만 내적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직관력으로 꿰뚫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야만 내관법은 우아일체 곧 신인합일의 경지를 경험하게 되고, 의념의 힘으로 우주의 가장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관법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이루어지는 아주 간단한 명상법이자 우아일체를 경험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결정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하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후 하늘의 뜻에 맡기며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내관법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편의 詩를 감상해보자.
내면의 치유(내적치유) - 청아당 엄 상 호 詩(2017. 10. 28.)
앞을 향해 달리다보면
뒤로 가는 자신을 놓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밖에서 알 수 없는 내면의 세계는
명상을 통해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뜬 후 소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호흡하는 수밖에 없다.
밖에서 찾을 수 없는 쉼터가 바로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자신의 길을 찾을 수도 있고
그동안 혹사시켜온
심신을 안정시킬 수도 있고
내적갈등을 해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피로회복제와도 같은
내면의 세계를 통해
밖에서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알다보면
활력소와도 같은 힘을 얻지 않겠는가?
예로부터
안팎을 드나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사를 오가기도 한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면의 스승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2019년 6월 30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자료출처 :
기독교적 인간이해에 기초한 『성서적 내적치유 세미나』 주서택, 김선화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