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에는 원인과 과정이 필요하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조차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한대로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인 것처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지도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듯이
결과만 바라보고
원인과 과정을 무시해버린다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딱 그만큼씩만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면 모르겠는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안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뒤돌아보면
딱 그만큼씩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우리가 가야할 길은 정해져 있다.
가까운 길이라도 먼 길을 통해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있고
먼 길이라도 빨리 도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겠는가?
원인과 과정을 착실하게 밟다보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많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신의 힘으로만 돌렸던 과거와는 달리
우주적인 작용을 의심해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해답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체전자석의 원리라는 이 속에는
많은 것들을 도출해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은
이제는 과거방식보다는
현실에 맞게 재수정해보자는 의미가 크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모든 의문은 왜? 라는 단어로 시작되었듯이
모든 해답은 그래, 바로 이것이다! 라고 외칠 때 풀린다고 본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지만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의 힘이 발 빠르게 따라오고 있기에
그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과학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왜? 라는 의문에 해답을 던져주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만 잘 풀린다면
그동안 신의 모습이 수천수만
아니 사람의 숫자보다 더 많은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했었는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려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다.
인간이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우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우주가 있기에
우리가 있고 모든 만물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 또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자
우주와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자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인합일이니 우주즉아니
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은 이와 같지 아니한가?
단어가 심오하고 현묘하다고해서
그 본뜻까지 심오하고 현묘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수행자의 그릇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부술 각오로 덤비고 있는
신광(神光)을 내뿜고 있는 안광(眼光)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은
생각보다 사소한 일에서 많이 발생한다.
그 의문은 스스로 풀면 되는데
성서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좋으나
날마다 귀를 기울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매우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기도를 올리는 것은 좋으나
감응이 없다면 이처럼 참담한 것도 없을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간절함이 아닌가?
간절함은 하늘도 움직인다는 옛말이 있듯이
간절함은 우주에너지와 통하게 되고
그 우주에너지가 가장 강렬한 것이 바로 태양이지 않은가?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우주에너지와 송과체의 관련성을 의심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풀 수 있는 것은
인체전자석의 원리에 있지 않나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신의 모습이나 색다른 세계를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적인 작용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뜻에
더 강한 의미가 있다고 보면 딱 맞는 말일 것이다.
왜? 빛의 예술 현상이 발현되어지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제각기 다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통해
밝혀보자는 데에 큰 의미가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인체전자석의 원리는
접근하는 수행자마다
다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커다란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결과에 대해선
어떤 결론이 나올지에 대해서는 현재 진행 중이라
빅데이터를 분석해가며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지금 이러한 생각 자체가
조금 무모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접근해보는 것은
수많은 역사를 통해 쌓여진 빅데이터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동안 성자나 각자가 수없이 갔던 길을 피해
새롭게 도전해보는 것은
과거의 빅데이터에 커다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적인 시스템에 커다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함정은
인간이 스스로 빠져나오겠다고 저렇게들 노력하고 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선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접근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바람처럼 흔들리는 마음이지만
날씨처럼 흔들리는 마음이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이 있지 않은가?
스스로 존재하는 자 자연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인가?
그 모든 것을 품으며
신도
종교도
우주까지도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그러고도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주고 있는 자연의 품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2019년 2월 21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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