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
소설이 되었든
문학이 되었든
역사가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경전이 되었든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글이다.
과거는 역사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고
현재는 그 시대상을 통해 밝혀지고 있고
미래는 과학의 언어가 다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 아무리 미래를 내다보는 눈으로
글을 써 나간다할지라도
미래에 일어날 4차 산업혁명, 5차 산업혁명, 6차 산업혁명 등
이러한 단어들은 찾아볼 수 없듯이
보다 구체적인 미래상에 대해선 윤곽만 나타날 뿐
세세하고 세밀한 현대 상처럼 그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경전은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그려져 왔기에
계속해서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듯이
하나님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도 획기적이다.
갑자기 끊겼던 구약과 신약의 간극에서 오는 차이도 있겠지만
구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이어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시대상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는 성서를 들여다보면
그 차이점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정 하에 말하고 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고승들이나 영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의 생각이나 글을 통해 읽다보면
그때 당시 획기적인 과학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경험담 또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늘 그래왔듯이
과거나 현재에 만족하는 글은 없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통해
좀 더 생동감 있게 그려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을 보면
과거나 현재보다는
미래를 개척하려는 노력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나 현재는 이미 다 아는 사실이기에
아마도 더욱 그러한 일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세계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도 중요하기에
이 또한 관심 있게 그려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어렸을 적부터 익혀오다 보니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호기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이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좋을 만큼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이든 신이든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관심 아닌 관심을 쏟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보니
당연한 현상인 것 같다.
서로 부딪히면서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삶의 활력소가 없어지기에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질수록 환심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냥 밋밋한 일상의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인간의 본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경전들은 인간과 신이 연결되어져 있고
이를 하나로 연결하려는 노력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과 신의 관심만큼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없다보니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경전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면서
설교와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에 부족했던 부분들을
계속해서 채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딱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1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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