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만 남겨두고 몸통은 잊어야한다
마음가는대로님
“하단전에 기를 충돌하는 게 이미지가 안 잡히는 것 같아서
인체전자석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이미지를 연상하면서
호흡을 했다.
48초 호흡을 하고 호흡 끝나기 10분전 가볍게 호흡하면서
좀 더 인체전자석을 연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그러다가 생각나는 게
처음 인체전자석 원리를 읽을 때
연상하는 게 딱 교과서처럼 정해진 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지침이 있으니 그 지침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지 그대로 하려고 애쓴 적도 있었는데
연상하는 건 원리를 이해하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맞는
다양한 형태로 시도하면서 만들어 가야될 것 같다.
그이미지를 만들고
새롭게 만드는 작업을 수없이 해야 자신에게 맞는걸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인체전자석의 원리가
처음에는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실전은 간단한데
이론은 복잡한 것처럼
원리만 남겨두고 몸통은 잊어야한다.
원리는 참으로 간단하다.
처음부터 인체전자석의 원리를 생각해서 한 것은 아니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해서 하다보니까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
인체전자석이라는 원리다.
인체전자석의 원리는
후학들을 위해 따로 지침을 마련해놓은 것이다.
모든 이론이 다 그렇듯이
실무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지거나
가설을 세운 후 그려지는 것이 이론이다.
실무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고
가설은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설은 예상과도 같다.
내일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비가 올 수도 있고
비가 안 올 수도 있다.
그 이론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보다는
보다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경우라면
지침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지침 없는 행보는
샛길로 빠져들게 하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인체전자석의 원리는
경락유통의 절정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실제로 느낄 수만 있다면
직접 체험해보고 싶은
이상적인 폭발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막연하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 원리를 이해하고 정진한다면
그러한 경지를 체험해볼 수 있는
길잡이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인체전자석이라는 용어로 탄생한 것이다.
인체전자석은 실제로 그러한 형태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만큼 강력하고 우주적인 폭발력이기에
누구나 그 원리만 이해한다면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주어진 텍스트대로 따라 했더라면
이러한 결과는 발생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름대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접근했고
그때는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이론적인 道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깨달음은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가 부족했다.
그것이 바로 체험이자 실무였던 것이다.
그때는 삶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사색하던 시절이었기에
철학을 비롯하여 역사, 동양철학, 사서오경, 시, 서, 화, 속독법, 기억법,
선, 단전호흡, 명상, 종교, 최면술, 심령학, 요가, 마인드컨트롤, 회계학,
과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결론은 늘 하나가 부족했다.
그 하나는 깊이 있는 명상이자 본질적인 깨달음이었다.
무엇이든지 그렇지만
자신과 맞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하면
우선 궁합이 맞아야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듯이
자신하고 맞는 것이 있다.
일단 궁합이 맞으면
온힘을 쏟아 앞만 보며 정진해야한다.
그것이 가장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어진 대로 따라할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창의적인 발상을 일으켜
다양한 접근방식을 연구해야하는 노력도 뒤따라야한다.
이러한 발상이나 노력 없이는
제자리조차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어디에 처해있건 치열하다.
더구나 호흡을 통해 지대한 꿈을 키우고 있다면
그 치열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할 정도로
대단한 열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실제로 수없이 생사를 오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도 걷지 않았던 초행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높은 호흡량을 극복해내기위해선
생사를 건 도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없이 생사를 오가며 느꼈던 것은
그래도 죽지 않을 만큼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높은 호흡량을 극복해낼 때마다
다가오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 모든 것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목숨 걸고 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다는 것이다.
인체전자석의 원리는 허구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러한 단계를 통해
과학적으로 보다 접근하기 쉽게
체계화시켜놓은 이론이기 때문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수련자마다 체질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근기와 열정이 다르다보니
반드시 그와 똑같은 결과를
얻어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수련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하지만
이론은 실무보다 항상 앞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증명되면 훌륭한 이론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증명이 안 되면 쓰레기와도 같은 이론이 되는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백해무익하다면
지금껏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러한 맥락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나름대로 값진 경험이자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
깨달음에 대한 설명은 천편일률적이다.
인체전자석의 원리를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처럼
깨달음이 그렇게 진부하고 틀에 박힌 듯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야말로
건들면 건들수록 한없이 샘솟아 오르는 맑은 물과도 같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12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