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전 살펴보기』/1-2. 공존하는 선악(인과율 적용)

공존하는 선악은 중용의 도이다

청아당 2019. 3. 22. 14:27

공존하는 선악은 중용의 도이다

 

1-2. 공존하는 선악 - [인체전자석학회]가 추구하는 핵심가치

 

1. 고요의 극점(우주의 가장 안쪽)

2. 공존하는 선악(인과율 적용)

3. 단광기기(기 증폭기)


 

 

[공존하는 선악은 중용의 도이다][인체전자석연구회]가 추구하는 핵심가치 중 두 번째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공존하는 선악이란?

 

우주 동력의 근간이 나선형 소용돌이라면, 공존하는 선악은 우주 속에서 활동하는 교차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주 생성소멸 속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고, 현실세계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악만을 추구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에서 마주해야할 난제중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공존하는 선악은 스스로 작동하는 자율적 상생과 상극의 제조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공존하는 선악은 선한 자에겐 위안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요, 악한 자에겐 경각심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이다.

 

중용의 도를 지키는 공존하는 선악이지만, 한쪽으로 기울면 작동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인과율과 연계되어져 있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고, 잘하면 잘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고, 상생(흡인력)이 있으면 상극(반발력)이 있듯이, 공존하는 선악은 중용의 도로 우주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우주적인 중심을 잡기에 공존하는 선악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곳을 가든 이 둘의 작용이 함께 움직이기에, 우주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그 끝과 시작을 알 수 없으며, 끝인가 싶으면 시작이요, 시작인가 싶으면 끝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도 하다.

 

 

선하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악하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선을 선이라고 말하는 순간 악으로 변하고, 악을 악이라 말하는 순간 선으로 바뀐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분명 선한 행위를 했으면 선으로 평가받아야하는데 악한 행위로 평가되어지고, 악한 행위를 했으면 악으로 평가받아야하는데 선한 행위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공존하는 선악은 절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상대적인 평가의 개념이다.

 

마치 저울과 같아 한쪽으로 기울면 무게중심을 바로 잡으려는 균형추역할과도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스스로 알고 행하든, 모르고 행하든, 공존하는 선악은 작동되어지고 있기에,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공존하는 선악은 우리들과 친근한 이웃과도 같고, 친구와도 같고, 가족 같은 사이로 지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공존하고 있다고 보면 맞는 말이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한다.

 

종교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우주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까지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착한정책을 펼쳤다고 생각한 순간, 오히려 악순환이라는 그물에 걸려,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오듯이, 정책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향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있는 종교에서조차, 각종 비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더라도, 선을 악의 행위로 비쳐지게 하고, 악을 선의 행위로 비쳐지게 하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악의 뿌리를 강조하고 있는 종교에서조차 선을 악으로 비쳐지게 하고 있다는 것은, 선과 악의 기준을 모호하게 하는 근본원인이기에, 이것을 따로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기준으로 명명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현상을 찾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점에 대해 오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두 편의 시를 감상해보자.

 

[공존하는 선악은 극과 극이 모여 있다] - 청아당 엄 상 호

 

흡인력이 상생이라면

반발력은 상극이다.

 

언뜻 보기에는 상생이 좋은 듯 하지만

상극이 없으면 상생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생만 좋은 것이 아니라

상극도 좋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좋은 것만

선한 것만 존재하는 세상에는 천국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무료하고 세상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서로 얽히면서 살아야만

사람 사는 맛이 나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극과 극으로 존재해야만

공존하는 맛이 난다.

 

 

고요의 극점은

신의 간섭을 피해있는 공간이기에

초월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곳이기에

가상의 공간이자 모두가 꿈꾸는 꿈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요의 극점에 영원히 존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드나듦이 없는 시공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영원의 침묵만이 잠든 곳이기에

누가 흔든다고 흔들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존하는 선악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우주를 뒤흔들

아니 근간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원리이기에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신이 되었든

성자가 되었든

현자가 되었든

범부가 되었든

그 누구도 공존하는 선악을 벗어날 수가 없다.

 

우주 동력의 근간이 나선형 소용돌이라면

공존하는 선악은 우주 속에서 활동하는

교차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수평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직을 향해 내리 꽂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수평과 수직이 하나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거나

팔방으로 퍼져나가거나

원으로 모여 퍼졌다가 모이기도 한다.

 

그 끝을 모르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보니

선과 악은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주 생성소멸 속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고

현실세계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선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악만을 추구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에서 마주해야할 난제중의 난제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공존하는 선악은 스스로 작동하는

자율적 상생과 상극의 제조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 청아당 엄 상 호

 

공존하는 선악은

선한 자에겐 위안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요

악한 자에겐 경각심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이다.

 

 

중용의 도를 지키는 공존하는 선악이지만

한쪽으로 기울면 작동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걷는 사람들을 위해

만행과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도 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인과율과 연계되어져 있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고

잘하면 잘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공존하는 선악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이다.

 

늘 천칭처럼 저울질하다가

어느 한쪽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하면

작동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늘 상존한다.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든 간에

선과 악은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선의 기준과 악의 기준일 것이다.

 

수치로 따진다면

선의 기준이 악의 기준에 도달했을 때

작동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요

악의 기준이 선의 기준에 도달했을 때

작동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위와 같은 기준에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점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큰일에까지 해당된다는 점이다.

 

큰일이 생길 때 전조증상이 나타나듯이

사소한 일이 모여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를 볼 수 있듯

사소한 일을 무시하거나 방치했다간

큰일로 번지게 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선이 선으로만

악이 악으로만 존재한다면

공존하는 선악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선이 악으로 변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요

자신도 모르게

악이 선으로 변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행할 때 나타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물론 안다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배려하다보면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하늘의 섭리는 공존하는 선악에서조차

작동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렇고

인과론에 결부되어져

선한 행동을 했는데도 악한 행동으로 비쳐지게 되고

악한 행동을 했는데도 선한 행동으로 비쳐지게 된다.

 

선이 악한 행동으로 바뀌게 된 이유이고

악이 선한 행동으로 바뀌게 된 배경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데도

현실에서는

이 양면성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아니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관통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신의 세계와 사후세계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종교에서 이러한 부분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을 우상으로 치부해버린다.

 

더구나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다 우상으로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다 불신자(不信者)와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사탄이나 마귀로 변하게 되고

우리들은 지금 사탄과 마귀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된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탄과 마귀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하나님을 잘 믿다가도 반항을 하거나 거역하게 되면

천벌을 받게 된다.

 

끊임없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믿고 또 믿어야만

하나님께 겨우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늘 인자하고 인내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애태우기도 한다.

 

 

하나님의 품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다.

 

한편으론 악하게 굴다가도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어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 순간부터 악한 허물을 다 덮어주며

선한 행동으로 바뀌도록 용서를 해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은 우주처럼 넓고도 넓으며

하해와도 같은 은혜로 언제든지 선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마도 성자들의 품도 이러한 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종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말씀엔

폐부를 찌르는 핵심이 살아있기에

이러한 생각은 더욱 힘을 얻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힘들 때

성자들의 말씀을 듣다보면 힘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경험과 현실적인 삶을 바탕으로 그려져 온 글이기에

그 힘은 더욱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기쁨을 주기위한 노력이요

악하게 살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걱정과 슬픔을 안겨주면 안되기 때문이다.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악한 행동보다는 선한 행동을 더 선호하는 것이 좋다.

 

그러고 보면

교만보다는 겸손이 더 좋기에 그렇고

교만은 겸손을 누를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추가자료 및 사례 :

 

청아당 :

공존하는 선악, 고요의 극점, 보이지 않는 손길에 대한 오해

http://blog.daum.net/yhedang/13627704

 

공존하는 선악 - 깨달음과 마음() 20170930

http://blog.daum.net/yhedang/10710757

3부 우주적인 생각 - 15장 공존하는 선악

http://blog.daum.net/yhedang/10710527

14장 결론 : 마음

http://blog.daum.net/yhedang/10710551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 공존하는 선악

http://blog.daum.net/yhedang/13627711

공존하는 선악은 극과 극이 모여 있다

http://blog.daum.net/yhedang/13627567

공존하는 선악은 허물을 감싸준다 하늘의 섭리

http://blog.daum.net/yhedang/13626542

공존하는 선악은 완벽에 가까운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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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보다는 단점을 말하게 되는 것은공존하는 선악

http://blog.daum.net/yhedang/13627696

기준은 정하되 자율적 삶을 선호한다공존하는 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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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해선 공존하는 선악의 덫에 걸리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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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하는 선악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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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http://blog.daum.net/yhedang/13623162

 

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 - 인간의 심장위에서

http://blog.daum.net/yhedang/13624167

 

2019322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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