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2.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 균형추 접근법

청아당 2019. 8. 20. 11:37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 균형추 접근법


<그림2-1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균형추 접근법>



<그림2-2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균형추 접근법>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 균형추 접근법

 

빈 공간을 파고드는 소통의 달인 바람이야말로 공존하는 선악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움직인다는 것은 이동수단을 타고 옮겨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렇고 옮겨다니다보면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남은 싫든 좋든 손을 잡고 반갑게 악수하듯이 만나야만하고 그 과정에서 생선 비린내 나는 수산물시장에서 빙빙 맴돌 수도 있고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악취 속에 갇혀 빙빙 맴돌 수도 있고 이름 없는 들꽃을 만나 반가움에 손을 내밀 수도 있고 향기가 진동하는 꽃밭에 앉아 자리를 깔고 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남은 꽃길 같은 만남이 있을 수 있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만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기쁨과 아픔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린내 나는 수산물 시장에서 맛있는 회나 매운탕거리를 사올 수도 있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그렇고 꽃길 같은 아름다운 만남 속에서 이별이라는 아픔을 겪을 수도 있기에 만남은 좋은 듯 하지만 나쁘고 나쁜 듯 하지만 좋은 만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남 그 자체도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365일 어떤 때는 미세하게 움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태풍으로 강하게 이동하기도 한다. 나뭇잎을 살펴보면 매일같이 바람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뭇잎이 움직이지 않는다하여 바람이 이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진공 속에 또 다른 물질이 존재하듯이 바람은 또 다른 바람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 구조도는 균형추 접근법으로 이해하면 쉽게 다가올 수 있다.

 

공존하는 선악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이치와 같기 때문에 인과율의 작용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성선설과 성악설을 하나로 아우르는 선악불이(善惡不二)나 명암불이(明暗不二)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선과 악은 둘이 아니다. 밝음과 어둠은 둘이 아니다. 마치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원앙처럼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는 연인사이이기도 하다.

 

선한 의지를 갖고 태어난 것이 성선설이라면 악한 의지를 갖고 태어난 것이 성악설이다.

우리들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둘로 나눠서 생각하려는 기존의 텍스트에 발목이 묶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발상은 비교의식이나 구분을 좋아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를 찌를 줄 아는 도()의 세계에서는 하나로 묶어 저 멀리 내던질 수 있는 과감성이 있음을 볼 때 굳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하나에서 전체로 순차적으로 퍼져나가거나 전체에서 하나로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오르고 내려가는 것은 같은 길이기에 마치 등산과 하산의 반복 같은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길은 하나인데 오고감에 있어 차이가 있다하여 그 길을 길이 아니라고 하는 꼴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길을 거쳐 가야 하는 길은 정해진 사실이기에 어떻게 보면 어찌해볼 수 없는 정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다.

 

천칭처럼 중심을 잡고 있다가 균형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선천적으로는 인()이라는 본심을 타고 태어난 측은지심이 일어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외면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고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타인의 목숨을 살릴려는 의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좋다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신경(수의근=골격근)인 체성신경계와 자율신경계(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인 불수의근(평활근+심장근) 그 자체로 보면 따로 구분되어져 보이지만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이 노출되어지고 있다. 거기에다 외부적인 요인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압, 압력, 약육강식, 강자와 약자 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미묘한 권력이동은 악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이 속에서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한다하더라도 악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기에 악이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악이 악을 불러들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악이 항상 악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선이라고 해서 항상 선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선이 악이 되기도 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면서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듯이 빙빙 돌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고나면 회갑이 되는데 반백년이 넘도록 그냥 살아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숱한 세월 속에서 겪어야했을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악한 의지와 선한 의지가 번갈아가며 얼마나 많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왔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선악불이(善惡不二)로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행하다고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며 불행한 가운데서도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듯이 행복하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행복한 가운데서도 불행은 언제든 그 빈틈으로 노크해 들어오기에 행불행에 대해 너무 깊이 있게 빠져들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오늘 행복하면 내일은 불행할 수가 있고 오늘 불행하면 내일은 행복할 수 있기에 행불행에 대해 너무 얽매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019821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