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 – 천일각
다산초당 – 천일각
다향소축(茶香小築)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비가 쏟아지는 늦은 시간 오후 5시경 다산초당을 찾았다.
마당 앞에 차려진 차 바위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과 제자들이 환담하며
차담을 나누는 모습이 선명하게 묘사된다.
빗방울이 거센 가운데 우산을 쓰고 대나무 폭포 연못을 지나
동암(東庵)에는 2천여 권의 책을 소장해놓고 지인과 객을 맞이하며
견문을 넓힌 곳이기도 하다.
초의선사가 명당자리라고 한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강진만을 내려다보면 한눈에 선경으로 변하기도 한다.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앉는 천일각이라
빗속을 뚫고 강진만을 향해야 하는 시야는 빗줄기에 그대로 잠긴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사색이 막힐 때 천일각에 올라 강진만을 내려다보면
시상과 더불어 막혔던 영감이 살아나는 신묘한 곳이라고 한다.
정다산 선생께서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직접 유채밭도 가꾸고 연못도 만들어 대나무 폭포수로 마음을 달랬던 곳이기에
다산초당은 단순한 초당이 아니라 윤 씨의 허락을 받아
정다산 선생께 주어졌던 천혜의 자원을 아낌없이 누렸던 것 같다.
18명의 제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제자 5대손이 운영하는 곳이 다향소축 민박집이다.
다산초당 오르는 길 우측에 자리한 묘지가 5대 증조부님이라고 한다.
94년에 찾아보고 31년 만에 찾아간 곳이다.
다산천문대가 새로 생겨나 있고 초입부터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때는 간결하게 초입을 지나 다산초당에 올라
대나무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을 바가지에 받아 마셨다.
지금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기리는 모습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에는 강진읍 강진만 한식집에서 한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31년 전 툇마루에 걸터앉아 시상에 젖을 수 있는
김영랑 생가 옆으로 명성을 얻었던 한식집에서 먹어본 후 두 번째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 문향다려(聞香茶慮) 홈카페에서
주인장께서 내어주신 꽃차와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닭장에서 꺼내 삶은 달걀로 아침 식사를 대용하였다.
노부부와 환담하는 중
정다산 선생께서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마을을 향해 소리쳐 불렀다고 한다.
다산회관에서 다산초당까지 300m의 거리에 있다 보니
산비탈 길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향다려 홈카페에는 노부부의 집안 내력이 간직돼 있었고
한양대 교수가 기증한 서책과 학문적 대화와 함께 유서 깊은 내력을 설명하고 있었다.
5대손에 관한 내용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인 유홍준 교수와 직접 통화하여
빠져있는 5대손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자 수정한 후 책을 보내주었다는 후일담도 알려준다.
노부부 두 분은 교육계에서 은퇴한 후
차향기와 더불어 정다산의 학문적 제자의 소박함을 담아
다향소축이라는 아담한 문구로 축약하여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의미는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고 각종 다양한 이름을 붙여
배롱나무, 독성이 강한 떼죽나무, 난초, 제비꽃 등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한다.
잔디밭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물어보니 로봇을 이용하여 관리한다고 한다.
로봇청소기처럼 생겼는데 대형 로봇청소기 형태라고 보면 된다.
덮개를 벗겨내고 비번을 푼 후 직접 시범까지 보여주신다.
무작위로 작동되며 센서가 설치되어져 있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3cm 높이로 맞춰놓으면 적당하다고 한다.
대나무가 있는 잔디밭 가운데에 등 거북이 모양의 바위를 사이에 두고
꼬리와 머리를 붙이니 거북이 바위로 변신해 있었다.
그 옆으론 시인 고은 선생의 시가 각인돼 있었고
정다산의 간략한 약력이 새겨져 옆으로 누워있는 와비(臥碑)로 서 있다.
다향소축의 노부부를 뵙다 보니 정다산 선생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인연은 바람과도 같아서 한번 연결되면 그 끝이 어딘줄 모르고 달려가기 마련이다.
바람이 불고 불어 차향과 문학적 산실로 자리 잡고 있는 다향소축에서
노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다음 일정을 위해 두륜산케이블카로 향했다.
2025년 5월 17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