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추상적이다 – 현상과 깨달음에 대해
깨달음은 추상적이다 – 현상과 깨달음에 대해
공허한 우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우주공간처럼
깨달음은 추상적입니다.
우주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보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현상과 동반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깨달음은 현상 없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상은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고
현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현상 때문에 깨달음을 놓치는 경우도 있고
현상 때문에 깨달음을 얻고도 고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상과 함께 경험하면
마음의 위안이 됩니다.
과거 선승들이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은 후
대오각성한 것도
현상 없이 깨달음을 얻은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현상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현상은 눈에 보이는 각종 기이한 현상들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투시나, 소주천, 대주천, 영통개안,
과거, 현재,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나, 전생, 사후세계,
지혜와 통찰력 등
각종 다양한 현상들이 신체에 통틀어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고도
영통개안이나 각종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마치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현상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수련을 계속하는 이상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다만 텍스트에 제공된 기준에 맞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호흡수련법은 기준은 정해져있지만
그 기준이 사람마다 모호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반드시 그와 똑같은 현상으로 나타나라는 법은 없습니다.
기준에 근접하는 유사한 현상이나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꿈속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만 이해해도 풀릴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만
텍스트에 제공된 기준에 맞추려다보면
본의 아니게 그냥 지나치거나
체험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현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허비한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한 채
그와 똑같은 현상만을 기다리며
오로지 한길을 가다보면
멀리 돌아가지 않아도 될 길을
너무 멀리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미 대주천이나 영통개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상에 대해 인지를 못한 나머지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자책하면서
홀로 정진하게 되는 경우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지도자와 수련자 간에 의사소통이 단절된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고 있는 점이지만
창의성과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휘어지게 하거나 평평하게 펼 수 있어야합니다.
사고의 유연성입니다.
제공된 기준에 맞추기보다는
수련자 자신의 기준에 맞춰야한다는 점입니다.
현상이나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자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비논리적이자 형이상학적이다 보니
추상적인 면이 강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이
현상과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다 다른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접근하다보니
전혀 다른 현상이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길은 각자 다르지만
결과는 하나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채
너무 멀리 돌아간 경우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소통의 부재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죄인이 된 경우라 할 것입니다.
선의로 잘못한 일이지만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현상이나 깨달음의 큰 틀은
수련자 자신은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과 같아
단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조언을 듣지 않으면
마치 어둠속으로 빠져든 것 같은 불안감이 도사리기 때문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지도자의 역할론 이자 조언입니다.
자기주도적학습이나 스스로 학습법의 최대 단점은
지도자와의 소통이 없으면 힘들다는 점입니다.
수련자의 이상증상이나 좋은 현상에 대해 명쾌하게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줄 의무가 있는데
소통의 부재로 인해 그것을 놓쳐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천하의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수련자의 고통과 상처를 생각하면
참으로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글로 남겨두는 것은
혹시라도 이러한 수련자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조금이나 대오각성할 기회를 줌과 동시에
스스로 자가진단을 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입니다.
힌트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듯 잠깐이면 됩니다.
가끔씩 기인들이 나타나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깨달음이 전부가 아님을
여실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욕은 먹지만
깨달은 사람이나
일반인이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답게 살다가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스님이나 목회자들도 절제된 생활 속에서 행동하지만
나중에는 술과 여색을 가까이하기도 합니다.
물론 전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교육자일수록 술과 여색을 밝히는 경우도 많듯이
사람 사는 일은 결국 사람답게 살다가 가는 일입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고고하게 학처럼 살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욕구와 욕망이 있습니다.
더구나 색욕은 그 누구도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다보니
어떠한 방식으로든 방출해내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추종자에 의해
깨달은 사람을 너무 우상화시켜놓은 것이 잘못이지
본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겠다는 데 무슨 이유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냥 사람답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면서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입니다.
깨달았다고
실수도 안하고
잘못도 안한다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자책하거나
자신을 그르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가 용서를 비는 것은
너무 빨리 놓아버렸다는 점입니다.
『청아당단전호흡 - 부설 인체전자석학회』을 운영하면서
도반님들에게 좀 더 각별한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 했었어야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지켜는 보았지만
아무래도 저의 부재로 인해
원활하게 소통이 안 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하다 보니
쉽게 관여하지도 못했습니다.
요즘에는
그나마 도반님들끼리 조차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아
흔쾌히 두 분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두 분 도반님들께도 용서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분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저로 인해 고통과 상처받았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