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수련과 마음에 관하여
호흡수련과 마음에 관하여
수행은 평생을 해도 모자란다.
지식은 평생을 쌓아도 모자란다.
행위로 모든 것을 다 덮기에는 문제가 있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허를 찌르고 들어가면 그냥 무너지는 것이 지식이다.
수행이 아무리 깊어도
논리적으로 들어가면 그냥 무너지는 것이 수행이다.
허공에 매달아놓은 깨달음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은
분명 잘못되었기에 현실로 끌어내리기 위해 하는 말이다.
세상에는 완벽한 것처럼 존재하지만
사실은 완벽한 것은 없다.
그것이 성자나 하나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항상 양면성에 처해 있어
인간에게 욕을 먹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병폐가 그렇고
불교의 병폐가 그렇고
기독교의 병폐가 그렇다.
성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손대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세상은 변하는데
과거로 회귀할 수가 없다.
의식주를 비롯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아니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성자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준만 완벽하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완벽할 수는 없다.
실행이나 실천에 문제가 있다면
궤도를 수정하거나 용도 폐기처분하는 것이 옳다.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하나님조차도
인간의 눈에 허점투성이로 보인다는 것은
그 누구도 완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성자나 하나님을 폄하하거나 폄훼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를 꿰뚫어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주를 창조해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비는 단 한번으로 족하다.
평범은 신비의 무덤이듯이
내공과 연륜이 쌓인 노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논하지 못하듯이
더구나 혁명이나 신비, 마법과도 같은 생활상에 대해 말해보아야
고개 한번 끄덕이거나 무심한 상태로 침묵을 지키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서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우주의 근원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우주의 이치를 꿰뚫어보아야 한다.
누구 한사람의 말이 옳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다 옳은 것은 아니듯이
주입식 학습은 오히려 커다란 부작용만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의 시대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융합되어져 움직이고 있는 시대다.
폐부를 찌르는 말도 현실에서 감동을 주어야하듯이
가상과 현실, 현실과 가상 또는
이 둘의 융합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갇혀있다면
도대체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하겠는가?
세 가지 모두 다
지금의 내가 속해있는 곳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 어느 곳을 선택해도 지금의 나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흡수련만 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공부만 한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을 한꺼번에 다 얻는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평생을 통해 수련을 해도 모자라고
평생을 통해 마음공부를 해도 모자라고
설사 이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모자라니
결국에는 깨달음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깨달음에 대해 너무 우상화시켜놓은 것이다.
그것이 성자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지
본래의 모습이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다.
깨달음위에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신위에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그 누구도 마음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우주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우주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손대지 말았어야했는데
문제는 거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2018년 7월 30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