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진리로는 배가 고프다
과거의 진리로는 배가 고프다
사람들의 속성은 늘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성자들이 세워놓은
동서양의 확고한 진리들은
이분법적인 사고로 정해져있다.
우주는 넓고 큰데도 불구하고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서양적인 사고방식으로
편을 갈라놓은 것이다.
동양 사람들은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기에
친근하게 다가올 수가 있고
서양 사람들은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기에
친근하게 다가올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조그마한 지구 안에서
동서양의 사후세계관이 서로 다르다는 점에 있다.
우주가 넓고 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성자라면
미래의 세계상을 보았어야했다.
이 얼마나 비좁게 느껴지는가?
우주는 넓고 큰데도
지구 안에서조차 이렇게 둘로 나뉘어
우주를 비좁게 만들어놓았으니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래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접근하는 방법은 다 다를 수가 있다.
동서양의 안목으로
성자들마다 특유의 접근법으로
우주를 본 것이나
사후세계를 들여다본 것이나
인간세계의 원리를 들여다본 것이나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으로 접근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자기주도적학습이자 스스로 학습법이다 보니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보다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는 점이다.
성자들이나
각자들이나
예외가 될 수 없다.
보통사람들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접근법에 대해 머리가 아플 정도이지만
시대상에 따라 특이한 논리로 풀어나가는
각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아무리 옳고 그르다할지라도
생각의 각도를 들이밀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흩어질 수 있기에
생각의 유연성이라는 독특한 놈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진리를 다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대로 다 받아들이되
좀 더 확장된 논리로
우주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만큼
생활상이 바뀐 만큼
충족시켜 주어야할 진리이기에
이러한 책무는 더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만으로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가 없다.
그러한 시대는 이미 지난 것으로 본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입증가능한 쪽으로 진리가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
결코 무리한 요구조건도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문제에 골몰하며
진리에 대해 입증가능하기를 원하고 있다.
초능력이나
우주세계가 물리학으로 입증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과학이라는 잣대를 들이밀 수밖에 없다.
물리학자들은
반복적으로 실험 가능한 상태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우주관이 아니라
객관적인 우주관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그러한 우주관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과거의 우주관과
현재의 우주관과
미래의 우주관이 달라야한다는 점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2018년 7월 17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