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공존하는 선악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선악을 구분하기 전에
수평부터 맞추어 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처음부터
선과 악에 대해선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쪽이 기울면 한쪽이 올라가기에
수평을 맞추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과 악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애매하다.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성에 대해
그 누가 답을 줄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기에
다중적 멀티플레이만이
유일한 해답으로 존재하고 있다.
공존하는 선악은
수평을 맞추기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공존하는 선악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를 때는
팔짱을 낀 채 관망하다보면 해결이 된다.
선과 악은 구분할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늘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는 일을
따로 구분해서 무엇 하겠는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는 말이 있듯이
국가적인 큰일을 앞두고
발버둥치는 일은 무엇 때문인가?
국가의 존폐 위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국치(國恥)도 불사하겠다는 뜻밖에 더 되겠는가?
외침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분과 매국노 행위이다.
고구려가 그러했고
조선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지금 일본이 움직이고 있다.
그것도
미국과 은밀한 대화를 나눠가면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한국은 일본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늘 뒤통수를 맞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금 야당에선 친일파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 없는 정당은 존재할 수 없듯이
정당보다는
나라를 먼저 걱정하는 정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새벽꿈에 남북한 전쟁이 발발하여
서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두보의 ‘국파산하재’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맹자의 ‘군주’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존하는 선악은 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공존하는 선악은 바람처럼 불고 있다.
우주가 회전력에 의해 지탱하고 있다면
바람은 움직임에 의해 지탱하고 있듯이 말이다.
2018년 4월 19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