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당 2017. 7. 26. 10:01

인천향교

 

인천도호부청사가 새로 지어지고

전통문화체험관이 새로 지어지고

인천향교가 새롭게 보수되어지고 있다.

 

기중기가 산중턱에서

대성전으로 연결되어져 있고

동무와 서무로 연결되어져 있다.

 

 

인천향교의 배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로 되어있고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되어있고

수복청(守僕廳)과 재실(齋室)로 되어있고

외삼문(外三門)과 홍살문(紅箭門)으로 되어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고,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인천향교가 창건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태종 6(1406)에 인천향교를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그 이전에 이미 인천에 향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병자호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숙종 27(1701)에 재건하였다.

 

향교의 뒤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부끄러운 역사지만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인천향교를 부천향교로 명칭을 바꾼 후

부평향교에 통합되어 수난을 겪었으나

해방 후 분리복원된 후 본래 명칭인 인천향교로 되돌려 놓았다.

 

 

홍살문 옆으론

부모님 공경이란 비석이 깔끔하게 세워져 있다.

 

 

전에는 명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진동하였는데

보수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낡고 허름한 탓인지는 몰라도

글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인천향교 옆으론

승학산 약수터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약수를 먹었던 추억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약수통에 물 퍼가는 소리가 들리고

줄을 서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 떠먹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문학산은

그 위용이 성스럽고

구름에 감길 때는

마치 한 마리 학이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문학산이 날개를 펴기도 했다.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길은

아름답다고 했다.

 

뒤돌아보는 길을 분명히 알고 가는 길은

성스럽다고 했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인가?

 

나아가야 할 길과

물러서야할 길을 알고 움직인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써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인연과 인연이 얽혀

만나야한다면

그것은 나아가야할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러서야할 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신뢰를 느낀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문학산과 문학경기장을 앞에 두고 있는 인천향교는

인천에 글 읽는 소리를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조상을 섬김과 동시에

충효의(忠孝義)를 근본으로 삼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기숙사 역할을 하고 있는

동재와 서재에서 숙식까지 하면서

배움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교육열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인천도호부청사가 함께하고 있어

농사와 인구 및 교육과 군사

그리고

부역 및 민사상까지 책임지고 있는

지방수령의 위엄이 함께하고 있기에

그 위상은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도호부사의 임무

도호부사는 도호부의 모든 행정을 통괄하는 자로서 그 주된 임무는 수령 칠사(守令七事)라 하여 농사와 누에치는 일을 잘 돌볼 것 인구를 늘릴 것 교육을 진흥시킬 것 군대에 관한 사무를 바르게 할 것 부역을 균등히 할 것 민사의 소송을 바르게 할 것 간교하고 교활함이 없도록 할 것 등 지방수령의 공통임무에 속해 있으며 지방관의 치적은 관찰사를 통해 매년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또한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에 임하는 등 군사지휘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더구나

인천도호부청사는

1392년 조선이 개국한 이래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355인의 인천도호부사를 배출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과 함께하고 있기에

그 위상은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실제로

조선왕조실로보다 더 연대가 높을 만큼

그 위상이 높아있다.

 

 

충의비(忠義碑)

유교(儒敎) 정치이념에서 충()과 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임금은 신하와의 바른 도리인 의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통해 민본정치(民本政治)를 구현하려 하였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될 당시(1460) 인천도호부의 관할범위는 부내면(府內面)을 비롯한 10개면이었고 또 현재 인천광역시의 관할범위 역시 10개 군구로 되어있어 이를 상징화하기 위해 이 비()10면으로 입체화하였다.

 

 

인천향교 옆에 위치한

소성관(邵城館)에선 뜨거운 한낮에도 불구하고

진행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행사를 하기 위해 또는

연주를 하기 위해 무대장치를 비롯하여

다양한 전통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인천도호부청사 입구에 서있는

2층 전각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친 듯이 날렵하게 생겼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용이 느껴지는

그런 자세로 서있다.

 

 

역사란 참으로 이상한 매력이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할 때가 있고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할 때가 있는

아주 고약한 못된 습성이 있다.

 

아마도 역사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천향교를 통해서

인천도호부청사를 통해서

역사를 알게 하는 이곳이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깨우침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2017726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