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수행과 생활

청아당 2004. 6. 18. 09:24
수행과 생활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삶이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도
구분을 지어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고목이 아닌 이상
흔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데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기쁨도 슬픔도 밖으로 내비쳐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왜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을
감정도 없는 목석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한없이 겸손해지려고 할 때 놓아두지 못하고
교만해지도록 부추기는가
다 알고 나면 배울 것이 없듯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을 뒤돌아보면
손에 쥘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
자연 앞에 서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처럼
깨달았다고
높은 영적인 힘을 얻었다고
자연이 그 사람만을 위해 따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있던가를
자연 앞에 서면
모두가 평등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깨달았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과 아집으로 틀을 세우고
정숙한 요조숙녀처럼 홀가분하게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아니면
간섭과 부대낌이 적은 깊은 산속에
홀로 우뚝 선 황금소나무처럼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태어난 데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윤회를 들먹이며
영적 능력을 높이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이루기 힘들기에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라는 소리밖에 더 들리겠는가
그래서 많은 수행인들은 너도나도
생활은 내팽개치고
수행에만 전념하려고 하지 않은가
도대체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그 야단법석인지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한다.
숲속에 들어가 나무들을 살펴보아라
깨달은 나무들이 어디 한둘인가를
차라리
방랑끼 많은 마음을 지니고
사람으로 태어나기보다는
나무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더 빨리 깨닫지 않은가
윤회를 통해 거듭 성장하려는 영적 진화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축지법을 쓰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우주를 마음대로 허물고 만들어내는 일은
영적인 세상이기에 가능하지 않은가
현실은 과학이 아니면
지구 밖을 튕겨나갈 수도
우주를 여행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영적인 진화는
사후세계에서는 성장되지 않고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가능한가
꿈과 이상 속에서는 자유의지에 의해
하룻밤사이에 궁전을 지었다 허물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과학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상상과 투시는 환상을 낳을 수 있지만
과학은 현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후세계도
현실세계의 연장선이지 않은가
그것도 통합된 사후세계가 아니라
동서양으로 분열된 인간적인 사후세계로
튀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은가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시야를 묶어두고
왜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사후를 생각하고
현실을 판단하는가
불교적인 사후세계
기독교적인 사후세계
각종 종교적인 사후세계를
들먹이기 전에
종교부터 통합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우주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잣대로 바라본 사후세계가 너무나 혼란스럽지 않은가
지구가 멸망한다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구에 새로운 세계가 건설된다하여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깨달은 사람이든
깨닫지 못한 사람이든
삶속에서는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역주의처럼
특혜주의처럼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만이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발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깨달으면 땅을 밟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지를
숨도 쉬지 않고 우주와 통한다고
특별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궁극의 세계를 보고
내면에서 찬란한 광휘로 온몸을 뒤덮는다하여
범인들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는지를
전생을 보고
우주 구석구석 다니면서
여행담을 들려준다하여
크게 달라질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자신 위에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자기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데로
변하리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해라고 한다.
깨달음은 단지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느끼는 것뿐이라고
우주는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달리는 현실이고
마음으로 모든 것이 변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옛 성자들은 정보의 부재 속에서
주관적인 우주를 생각하며
인간을 위한 우주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추종자들은 말한다.
옛 성자들을 오랜 세월 다듬어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성과 기쁨으로 가득한
완벽한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그리고 발달된 과학의 힘으로 우주를 보면서
옛 향수에 젖어
종교를 위한 과학은 신앙처럼 높이 받들고
종교를 헐뜯는 과학은 불신으로 몰아간다.
꿈과 이상은 가공할 수 있지만
현실은 실제상황인 것처럼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충실해야한다고 한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목표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듯이
현실에 충실하기위해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해야한다고
일부의 각자들은 과학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
부작용이 많은 과학을 천대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인류의 꿈을 현실로 나타나게 해주는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과학이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과 영적인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보아라
과거의 막연한 환상과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기적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힘이 동원된 과학이지 않던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세계와
발을 딛고 선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아야하고
영적인 세계에서는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한다.
현실 속에서 사후를 생각하고
사후에서 현실을 생각한다면
혼란 속에서 현실을 살 뿐이다.
혼동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처럼
현실에 살 때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사후에 살 때는 사후적인 감각으로 살아가야한다.
많은 사람들은 꿈을 꾼다.
우주가 인간이 생각한데로 움직여주기를
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우주를 이용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듯이
인간은 우주속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주는 인간을 단지 포용하는 것뿐이라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주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생각해야한다고

2004년 5월 10일 월요일

수행과 생활에 대해서...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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